여행은 늘 '이동'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나는 이번엔 이동 대신 ‘머무는 걷기’를 선택했다.
한 도시에서, 한 길만 정해 그 길을 끝까지 걷는 여행.
지도에 여러 점을 찍는 대신, 단 하나의 선 위에서 도시의 결을 따라가는 방법.
이 여정은 예상을 훨씬 넘어선 감정과 풍경들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이번에 내가 걸은 길은 도쿄 시모키타자와의 하나조노 거리.
카페와 소극장, 오래된 찻집과 빈티지 숍, 주택가와 상점가가 혼재한 이 길은
짧지만 밀도 높은 변화를 품고 있는 길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도시의 진짜 얼굴과 마주할 수 있었다.
길의 시작 – 대로에서 만나는 도시의 공식적인 얼굴
하나조노 거리의 시작은 시모키타자와역 북쪽 출구에서부터였다.
첫인상은 ‘도쿄답다’는 느낌이었다.
깔끔하게 정비된 인도, 질서 정연한 간판, 익숙한 체인 커피숍.
사람들은 빠르게 걸었고, 말수는 적었다.
이곳은 도시가 외부인에게 내보이는 공식적인 얼굴 같았다.
하지만 한 블록, 두 블록 걷다 보면 조금씩 온도가 달라진다.
유리벽 대신 나무 창틀이 등장하고, 통일된 간판 대신 손글씨 간판이 나타난다.
고양이 마스코트가 걸린 미용실,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독립 서점,
그리고 의자 두세 개밖에 없는 조용한 찻집.
대로는 도시의 겉면이라면, 그 길을 따라 걷는 건 도시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골목으로 스며드는 순간 – 무심한 디테일 속 감정들
대로에서 벗어나 어느 순간, 길은 더 좁고 조용해진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작은 골목,
도로와 인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곳,
그리고 갑자기 낮아지는 건물의 높이.
나는 그 골목에서 시간의 밀도를 느꼈다.
작은 자전거 가게 앞에 놓인 삐걱거리는 벤치,
밖에 널어놓은 마른 이불,
아이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 엄마.
이 모든 것이 '누군가가 사는 곳'이라는 걸 말해준다.
어느 주택가 입구에는 작은 나무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여기에서 큰 소리를 내지 말아 주세요. 고양이들이 자고 있어요.”
도시는 거대하지만, 그 안의 골목은 작고 조용한 배려들로 가득했다.
나는 그 표지판 하나에서, 이곳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도시를 대하는 태도를 느꼈다.
걷기의 끝에서 발견한 것 – 익숙함과 낯섦 사이의 도시 감정
하나조노 거리의 끝은 갑작스레 주차장과 슈퍼가 있는 평범한 공간으로 이어졌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순간 가장 진한 감정을 느꼈다.
그 길을 처음 걸을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눈에 들어왔고,
사람들의 표정, 건물의 색감, 심지어 공기까지도 어딘지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걸으며 나는 그 길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 도시가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공간을 채우고 있는지,
그들의 조용한 삶이 얼마나 단단한지.
한 길만 걷는 여행은 도시를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단어 같았고, 중간에는 문장이 되었으며, 끝에서는 감정이 되었다.
그 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천히 걸으면, 도시도 당신을 기억해줄 거예요.”
‘길’이라는 가장 진실한 여행 방식
이 여행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한 도시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방법은 화려한 관광지도, 유명한 맛집도 아니다.
그저 한 길만 정해서, 그 길의 흐름을 따라 걷는 것.
대로에서 골목까지,
사람에서 사물까지,
낯섦에서 익숙함까지.
도시라는 거대한 생명체를 한 호흡으로 읽어내는 일.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여행을 시작할 땐,
꼭 ‘한 길’을 고를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도시의 표정, 그리고 내 감정이 천천히 변해가는 걸 조용히 기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