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에서의 여행이 익숙해질 즈음, 나는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현실적인 경험을 한다. 그곳은 호텔도, 유명한 맛집도 아니다. 바로 '편의점'이다. 현지인의 삶이 그대로 묻어 있는 공간, 작고 빽빽한 진열대 사이를 걷다 보면 그 나라 사람들이 아침을 어떻게 시작하는지, 야식으로 무엇을 즐기는지, 간식 하나에도 어떤 취향이 담겨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여행자에게 편의점은 그 자체로 로컬 문화의 미니어처다. 오늘은 내가 다녀온 몇몇 나라의 편의점에서 만난 음식들을 중심으로, “진짜 추천하고 싶은 편의점 음식 리스트”를 소개해본다.
단순한 간편식이 아닌, ‘한 끼 이상의 기억’을 남긴 음식들이다.
1. 아시아
일본:
일본은 전 세계에서 편의점 문화가 가장 발전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 로손이라는 삼대장 편의점은 서로 경쟁하듯 신제품을 내놓고, 품질과 구성, 비주얼까지 매달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편의점 하나로 아침, 점심, 저녁 모두 해결해도 전혀 질리지 않는다. 그만큼 ‘편의점 음식’이라는 카테고리 자체의 품질이 높다.
삼각김밥이 아니라 ‘오니기리’ – 밥맛이 다르다. 처음 일본 편의점에 갔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삼각김밥의 밥이 찰지고 부드럽고,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한정 상품으로 나오는 ‘구운 연어 오니기리’는 마치 집에서 방금 지은 밥 위에 연어를 얹은 듯한 맛이었다.
특히 패밀리마트의 ‘차조기 우메보시 오니기리는 톡 쏘는 매실의 신맛과 깻잎의 향긋함이 어우러져 아침 식사로 부담 없이 좋았다.
일본의 오니기리는 속 재료보다 ‘쌀의 품질’과 ‘밥 짓는 방식’ 자체에서 진가가 드러난다. 작은 음식 하나에도 장인의 정신이 깃든 나라답다고 느꼈다.
겨울엔 역시 오뎅. 일본 편의점 겨울 대표 메뉴는 단연코 오뎅이다. 카운터 앞에 놓인 투명 용기 속, 진한 다시 국물에 잠겨 있는 다양한 재료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합은 콘부마키, 다이고, 그리고 시라타키. 포장을 요청하면 국물도 넉넉히 담아준다. 겨울날 도쿄 길거리에서 편의점에서 산 오뎅 한 그릇을 들고 먹는 기분은 고급 일식당보다 더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디저트 수준은 카페급이다. 로손의 ‘프리미엄 롤케이크’는 이미 전설이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크림, 밀도 높은 시트, 그리고 단맛의 완벽한 균형. 세븐일레븐의 '진한 우지말차 푸딩'은 일본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담아낸 디저트였다. 한 입 먹자마자 입 안에서 말차 향이 폭발했을 때, 나는 ‘편의점에서 이런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라고 감탄했다.
태국:
향신료와 열대의 감각이 담긴 한 끼. 태국의 편의점, 특히 세븐일레븐은 현지인들 일상 속에서도 식당 대신 이용되는 공간이다. 한국보다 훨씬 많은 메뉴가 데워 먹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향신료와 고수, 코코넛 밀크 등 태국 고유의 식재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마 똠얌 컵라면, MSG의 황홀한 진화라고 할 수 있다. 태국 편의점에서 가장 먼저 찾은 건 단연 마마 똠얌 컵라면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태국 컵라면이겠지”라고 생각했지만, 한 입 먹는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강렬한 라임 향, 똠얌 특유의 시큼한 맛, 그리고 적당히 얼얼한 매운맛. MSG임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끓인 것보다 더 깊은 국물 맛이 난다. 여행 중 피곤할 때, 숙소에서 야식으로 이보다 더 완벽한 선택은 없었다.
바질 치킨 라이스는 진짜 태국 가정식 그대로다. 세븐일레븐의 대표 도시락은 ‘바질 치킨 라이스’다. 태국 가정식으로 유명한 메뉴인데, 편의점 퀄리티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완성도를 자랑한다. 포장을 열면 바질과 마늘 향이 코를 찌르고, 반숙 계란이 위에 얹혀 있어 비주얼까지 완벽하다. 전자레인지에 1분 30초만 데우면, 진짜 태국 가정식 한 끼를 완성할 수 있다.
코코넛 밀크 푸딩과 바나나 잎 케이크.. 너무 맛있다. 디저트로는 코코넛 밀크 푸딩이 최고다. 찹쌀이 들어간 푸딩 위에 진한 코코넛 소스를 부어 먹는 형태. 달콤하고 부드러우며, 열대 과일 특유의 진한 풍미가 있다. 또한 카놈 톰이라는 바나나 잎에 싸인 전통 간식도 편의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전통이 현대화된 방식으로 진열되어 있어 소소한 문화 체험의 느낌까지 더해준다.
대만:
대만 편의점은 도시락, 핫푸드, 차 종류, 전통 디저트가 가볍고 건강한 느낌으로 구성되어 있다. ‘야시장 간식’을 간편하게 재해석한 느낌의 메뉴가 많다.
일단, 찻잎 달걀! 편의점 입구에 둥글게 쌓여 있는 찻잎 달걀은 대만 여행자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간식이다. 짭조름한 국물에서 오래 졸인 듯한 달걀은 속까지 간이 잘 배어 있고, 작은 컵에 하나씩 포장돼 있어서 이른 새벽 간식으로 제격이다.
그리고 노루궁뎅이 도시락, 미소우동, 고기밥은 말 그대로 소소한 힐링이다. 대만 편의점의 도시락은 고기덮밥, 된장국 우동, 야채 듬뿍 닭고기죽 등 부드럽고 순한 맛이 인상적이다.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즉석식이지만, 마치 누군가 정성 들여 만든 느낌. 외국인 입장에서도 자극 없이 편하게 즐길 수 있다.
2. 유럽
프랑스:
작지만 우아한, 프렌치 감성의 패키지.
프랑스 편의점은 일본이나 태국처럼 다채롭진 않지만, 작고 정제된 유럽식 감성이 깊게 스며들어 있다. 특히 바게트, 치즈, 요구르트, 간단한 샐러드류는 편의점에서도 레스토랑 못지않은 퀄리티를 보여준다.
파리의 ‘프랑프리’에서 구입한 잠봉 바게트 샌드위치는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딱딱한 바게트 속에 부드러운 버터, 얇게 썬 햄, 그리고 살짝 짭조름한 피클. 재료는 단출했지만, 질감과 맛의 밸런스가 완벽했다. 커피 하나만 곁들이면, 파리 어느 골목에서도 완벽한 프렌치 브런치가 된다. 또한, 프랑스 편의점에서 가장 인상 깊은 코너는 ‘냉장 치즈 섹션’이다. 브리 치즈, 까망베르, 푸마쥬 블랑 같은 고급 치즈들이 작은 포장 단위로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또한 ‘La Fermière 요거트’는 유리병에 담긴 요구르트로, 한 입 먹는 순간 “이게 요거트였어?”라는 감탄이 나올 만큼 진하다. 꾸덕꾸덕한 질감과 고소한 맛은 디저트 이상의 풍미를 준다.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편의점은 '타바치'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담배, 버스 티켓, 커피, 간단한 빵 등을 파는 생활 밀착형 공간이다. 대형 체인 편의점은 드물지만, 작고 오래된 키오스크 스타일의 매장에서 진짜 로컬의 맛을 경험할 수 있다.
파니니와 포카치아 – 빵 속에 이탈리아가 있다. 편의점에는 종종 조리된 샌드위치나 파니니가 있다. ‘프로슈토, 모짜렐라, 루꼴라’ 조합은 진짜 식당에서 먹는 맛과 큰 차이 없이 완성도 높다. 포카치아 스타일의 포장 샌드위치도 많고, 전자레인지나 토스터기가 구비된 곳도 있어 간단히 데워 먹을 수 있다.
이탈리아 편의점에서 감동적인 건 대부분 매장에 작은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다는 점. 작은 종이컵에 진하게 추출한 에스프레소를 1유로 미만에 마실 수 있다. 기차 타기 전, 혹은 이른 아침 산책 후 작은 카페 대신 편의점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여는 느낌. 그 감성이 꽤 오래 기억에 남는다.
3. 미국 – 편의점보다는 ‘미니 마트’라는 문화
미국의 편의점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처럼 정교한 도시락이나 즉석식보다는, 가공식품 중심의 빠른 소비 문화를 기반으로 발전했다.
7-Eleven, CVS, Walgreens 등 대표 체인점이 있지만, 실제 미국 여행 중 인상 깊은 편의점 경험은 지역 기반 ‘가스 스테이션 겸용 편의점’에서 찾아온다. 미국 편의점의 아이콘이라면 핫롤러에서 익는 핫도그다. 소시지를 돌돌 굴리며 익히는 그 기계는 미국 로드트립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한쪽에 놓인 번과 토핑(피클, 치즈, 할라피뇨, 머스타드, 케첩)을 직접 조합할 수 있어 나만의 핫도그를 만들 수 있는 점도 재미있다. 또한 프레즐빵에 소시지가 들어간 ‘소프트 프레즐’도 강추 메뉴. 탄수화물과 단백질 조합이 여행 중 허기를 빠르게 채워준다.
미국 편의점은 초콜릿 종류의 다양성이 압도적이다. 같은 리즈라도 다크 초콜릿, 화이트 초콜릿, 퍽퍽한 브라우니 타입 등 한국에선 보기 힘든 한정판 시리즈를 만날 수 있다. 특히 7-Eleven 한정 스니커즈 아이스크림 샌드위치는 “이건 디저트인가, 폭력인가” 싶을 정도로 진하다.
차가운 우유 한 병과 함께 먹으면 숙취도 피로도 사라지는 마법.
사람들은 여행지에서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시간을 보낼지 고민한다. 그런데 때로는 아주 사소한 일상이 여행 전체를 따뜻하게 기억하게 해준다. 그건 바로 새벽에 편의점에서 사온 커피 한 잔일 수도 있고, 도시락을 먹으며 바라본 도심 풍경일 수도 있다. 나는 그래서 여행 중 하루에 한 번은 ‘편의점 루틴’을 넣는다. 아침엔 따뜻한 오니기리랑 생수, 점심엔 현지식 도시락과 차, 그리고 저녁엔 간식과 디저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편의점이라는 공간이 그 도시의 생활 리듬을 닮아있기에 여행자에게도 특별한 감정을 선물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