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인생샷을 찍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있다. 태그 몇 개만 붙여도 전 세계의 유명 포토존, 핫플, 인생샷 명소가 수천 개씩 쏟아진다. 누구나 비슷한 각도에서, 비슷한 포즈로, 비슷한 색감의 사진을 찍는다. 그만큼 사진을 위한 여행은 익숙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내 여행은 조금 다르다. 유명한 풍경보다 “그림처럼 보였던 장면”을 기억한다. 그건 가이드북에도 없고, 인스타 태그에도 잘 안 나오는 장소들이다. 지나가는 길, 우연히 들어선 골목, 실수처럼 걸은 언덕길… 그런 장소에서 나는 내 인생 사진을 찍어왔다. 이 글은 그런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림 같은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의외의 장소들. 단지 배경이 아니라, 감정과 사유까지 담긴 풍경들에 대하여.
고속도로 옆 주차장 너머 – 이탈리아 폴리냐노 아 마레
폴리냐노 아 마레는 이탈리아 남부 아드리아 해에 접한 작은 마을이다. 대부분은 이곳을 레코멘드하지 않는다. 로마도, 피렌체도, 아말피도 아닌, 그야말로 현지인들이 조용히 여름을 보내는 휴양지. 나는 막연히 ‘남부의 바다가 궁금하다’는 생각으로 이곳을 찾았다.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마을로 들어섰을 때, 처음 내린 곳은 허름한 슈퍼와 주차장이 전부였다. 관광지라기보다는 마을회관 앞 같았다. 마을 안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사람은 거의 없었고, 길은 돌바닥이었다. 좁은 골목이 이어지는 와중, 갑자기 시야가 트이며 난간이 하나 나타났다.
그 아래를 들여다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깎아지른 절벽과 하얀 집들, 그 사이로 파란 바다. 절벽 아래엔 수영하는 아이들과 바위에 앉은 노인들이 있었다. 관광지의 틀에 박힌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공간의 살아 있는 풍경이었다. 그 순간 찍은 사진은, 내가 지금까지 찍은 어떤 인생샷보다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곳의 바람, 바다 냄새, 절벽 위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
여행자 팁:
구글맵에서 'Via Narciso'로 검색해보세요.
정식 뷰포인트보다는 마을 북쪽의 주택가 뒷길에서 보는 뷰가 더 자연스럽고 깊습니다.
저녁 6~7시 사이, 해가 바다를 적실 때가 최고의 타이밍.
전철 종점 뒤의 언덕길 – 스위스 라우터브루넨
스위스에는 너무 많은 ‘풍경의 클리셰’가 있다. 융프라우의 설경, 체르마트의 마터호른, 루체른의 호수… 모두 환상적이지만, 그만큼 예상 가능한 풍경이기도 하다. 내가 찾은 건 라우터브루넨 종점 뒤의 언덕길이다. 기차를 타고 마을 중심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폭포 쪽으로 몰린다. 하지만 나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Staubbachfall’를 지나 작은 교회 옆 오르막길, 그 길을 따라 약 20분 정도 올라가면, 정식 관광코스가 아닌 풀밭과 목장 사이의 전망대가 하나 있다. 그곳에서 본 풍경은, 조금은 거칠고, 조금은 무질서했다. 하지만 그게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협곡 속을 흐르는 강, 작게 움직이는 기차, 그리고 나무들 사이로 들리는 새소리. 나는 거기서 몇 시간을 앉아 있었고, 사진을 찍기보다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 후에 찍은 사진은 모두 그 순간의 정적과 감정을 품고 있었다.
여행자 팁:
역에서 Staubbachfall 반대 방향, 작은 목장과 산책로 표시를 따라 올라가세요.
삼각대 없이도 안정적인 촬영이 가능한 벤치 뷰가 있습니다.
여름에는 6월, 가을은 10월이 가장 이상적인 시즌.
산책로를 빠져나온 뒷길 – 포르투갈 시뉴의 붉은 절벽
리스본에서 남쪽으로 1시간 떨어진 어촌 마을 시뉴. 이곳은 대부분 생선구이 식당이나 조용한 해변으로 찾는 여행지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맛집보다 더 기억에 남는 풍경을 시뉴 외곽 절벽길에서 마주했다. 낮엔 햇살이 너무 세서 일부러 해 질 무렵에 숙소를 나섰다. 구글맵에도 표시되지 않은 소로를 따라 걷다가, 불쑥 나타난 터널을 지나자 바위투성이 절벽이 나타났다. 그 끝은 바다로 바로 떨어지는 낭떠러지. 하지만 위험하다기보단, 웅장하고 묵직했다. 바위는 붉고, 바다는 회청색. 하늘은 핑크빛으로 물들고, 그 위로 새 한 마리. 그 그림을 보고 나는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풍경이 아니라, 자연이 만든 회화 같았다.
여행자 팁:
'Praia do Ribeiro do Cavalo' 해변 진입 전 왼쪽으로 틀어지는 흙길.
일몰 30분 전, 역광이 바위를 붉게 만들며 최고의 조명.
삼각대 필수. 바람이 세고 바닥이 울퉁불퉁하니 안정적인 셋팅 필요.
내가 담은 건 배경이 아니라 ‘느낌’이었다. ‘그림 같은 풍경’이란 무엇일까? 구도를 잘 잡은 사진? 색감 보정이 잘 된 컷? 사람 없는 명소에서 찍은 독점 사진? 그것도 맞다. 하지만 진짜는 다르다. 그 순간의 감정이 녹아든 장면, 그 시간의 바람과 온도, 공기의 냄새까지 담긴 사진.
그런 사진은 명소가 아니라 ‘의외의 장소’에서 나온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계획하지 않았기에, 그 순간이 더 진하게 남는 것이다. 다음 여행에서도 나는 가이드북보다 골목길을, 유명한 전망대보다 뒷산 언덕을 먼저 오를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그림 같은 풍경은 항상 그 너머에 있으니까.
아쉬우니까 아주 짧게 국내 편도 아래에 적어본다. 의외로 그림 같았던 한국의 풍경 장소들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에서 사진 찍기 좋은 곳 하면 제주도, 남산타워, 경복궁, 한강 뷰 정도를 떠올린다.
물론 아름답다. 하지만 그곳은 모두가 알고, 이미 수없이 찍힌 풍경들이다. 나는 늘 그 너머를 찾았다. 조금은 낡고, 조용하고, 어쩌면 다소 시시하게 느껴지는 장소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장소에서 사진은 더 진하고, 감정은 더 선명했다. 지금부터 소개할 곳들은 서울, 강원, 전라도, 경상도에서 우연히, 때로는 일부러 찾아간 곳들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정말 '그림 같은 순간'을 만났다.
서울에는 수많은 야경 명소가 있다. 한강, 남산, 북촌, 북악 스카이웨이…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밤섬이 보이는 마포대교 아래쪽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포대교 위를 달린다. 차를 타고 스치듯 지나간다. 하지만 다리 아래, 바로 그 물가에선 한강이 가장 고요하게 흐른다. 특히 가을철 해 질 무렵, 노을빛이 강물을 핑크빛으로 물들일 때 그 장면은 그 어떤 야경보다 아름답다. 사진을 찍는다는 생각 없이 앉아 있다 보면, 순간순간 프레임이 만들어진다.
강원도 평창 봉평의 메밀밭 뒤편은 메밀꽃 축제로 유명한 봉평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효석 문학관 근처에서 사진을 찍고,
인증샷을 남긴다. 하지만 정작 진짜 그림 같은 풍경은 그곳에서 조금 더 들어간 들판 뒤편에 있다. 나는 우연히 한 포토그래퍼의 블로그를 보고 그 길을 따라 들어갔다. 사람은 없었고, 길은 흙먼지가 날렸다. 하지만 도착했을 때 펼쳐진 풍경은 하얀 들판 위에 바람이 수놓은 그림 같았다. 꽃은 정중앙보다 가장자리 부분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그림’처럼 보였다. 하늘은 파랗고, 꽃은 하얗고, 중간중간 소나무와 초가가 풍경을 완성했다.
나는 고흥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생선 말리는 마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고흥 녹동항 옆의 작은 언덕길을 걷다 보면, 마을 어귀를 지나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바다 자체가 아름다운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언덕 위에서 바라본 풍경은 사람 냄새가 나는 풍경화였다. 배가 떠나고, 고양이가 식당 앞에서 졸고, 노인이 빨래를 널며 흥얼거린다. 그 모습 그대로가 프레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경북 예천의 회룡포는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다. ‘드론 샷 명소’로 유명하지만, 진짜 감동은 전망대에서 내려온 뒤, 평야 속 작은 오솔길에서 찾아온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논과 밭 사이로 강이 곡선을 그린다. 그 곡선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 같고, 빛이 내려앉을 땐 강물이 붓끝처럼 번진다. 나는 드론 없이도 단 2미터 높이의 작은 언덕에서 그 모든 장면을 담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