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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추천하는 취향 속에서 나는 사라지는가?

by 권산travel 2025. 5. 8.

취향은 나의 것인가, 알고리즘의 것인가? 어느 날 아침, 내가 켠 유튜브에는 내가 어젯밤까지 몰입해 있던 밴드의 관련 인터뷰 영상이 자동으로 추천된다. 점심시간, 넷플릭스는 "당신을 위한 추천작"이라는 이름으로 기가 막히게 내 기분과 일치하는 드라마를 제안한다. 퇴근 후 쇼핑 앱을 열자, 내가 꼭 필요하던 스타일의 셔츠가 눈앞에 나타난다. 마치 누군가 내 마음을 엿보고 있는 듯한 이 추천들은 편리하고, 때로는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건 정말 내가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AI가 좋아하라고 유도한 걸까?’
‘나는 지금 내 취향을 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알고리즘이 설계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우리는 오늘날, 데이터와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선택의 환상’ 속에 살고 있다. AI는 우리의 클릭, 시청 시간, 좋아요, 스크롤 속도, 위치 정보, 이전 구매 내역 등을 종합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추천을 제공한다. 이 추천은 나의 취향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믿고 싶지만, 실은 취향 자체가 AI의 손끝에서 길들여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취향’이란 무엇인가. ‘나’라는 존재의 개성과 연결되어 있는 정체성의 표현일까, 아니면 소비 플랫폼 위에서 생성된 허상일까?
이 질문은 단순한 개인적인 호기심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어떤 사회를 살고 있고, 기술이 인간의 ‘자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묻는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 

 

AI가 추천하는 취향 속에서 나는 사라지는가?
AI가 추천하는 취향 속에서 나는 사라지는가?

AI의 추천 시스템은 어떻게 나를 길들일까? – ‘선택의 자유’는 진짜일까?

알고리즘은 어떻게 ‘나’를 학습할까? AI 추천 시스템은 단순한 데이터 정렬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동 패턴을 학습하고, 그것을 토대로 ‘미래의 취향’을 예측한다. 예를 들어 유튜브는 시청 시간을 기준으로, 넷플릭스는 시청 완료율과 중간 이탈률을 기반으로 추천을 최적화한다. 쇼핑몰은 장바구니에 담긴 상품뿐 아니라 ‘보고 지나친 상품’까지 분석에 포함시킨다. 결과적으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보다는 ‘무엇을 더 오래 머무르는지’, ‘무엇에 반복적으로 반응하는지’가 추천의 기준이 된다. 즉,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취향의 패턴까지도 AI는 포착하여, ‘넌 이런 걸 좋아하잖아’라고 확신에 찬 제안을 던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경계에 서게 된다. 추천을 받아 선택하는 주체인가, 아니면 추천에 반응하는 소비 기계인가. AI 추천 시스템은 효율성을 추구한다. 효율성의 핵심은 반복되는 패턴의 강화다. 이로 인해 사용자는 점점 더 비슷한 콘텐츠, 유사한 정보, 유사한 상품을 접하게 된다. 음악 스트리밍 앱은 익숙한 장르만을 반복 재생하고, SNS는 내가 자주 누른 ‘좋아요’의 세계만 보여준다. 이 현상은 흔히 ‘필터 버블’, 혹은 ‘에코 챔버'라고 불린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다양한 면모를 마주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의 확장판만 보게 된다. AI는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 같지만, 실은 내가 ‘덜 낯선 것만 선택하게끔’ 설계한다. 이 반복은 점차 ‘취향의 고립’을 낳고, 나의 세계는 넓어지기보다는 좁아진다. 선택의 자유가 있는 듯하지만,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AI는 내 취향을 ‘보조’하는가, 아니면 ‘생산’하는가? 예컨대, 어떤 장르의 영화를 처음 접하고 ‘의외로 좋았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그 경험은 대부분 우연, 추천받지 않은 선택, 혹은 다른 사람의 권유를 통해 발생한다. 그러나 AI는 우연을 제거한다. 예상 범위 밖의 콘텐츠는 ‘비효율’이기 때문이다. 결국 AI의 추천은 내 취향을 날카롭게 조정하고 다듬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의 여지를 제거한다. 마치 길들여진 동물처럼, 우리는 늘 ‘만족스럽지만 익숙한’ 콘텐츠 속에 머문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어디에 있는가 – AI 취향 속에서 정체성은 어떻게 흔들릴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현대 사회에서 ‘취향’은 정체성의 핵심이다. 누군가를 소개할 때,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쓴다.
“그 친구는 재즈를 좋아해.”
“그 사람은 인디 영화 마니아야.”
“얘는 무조건 하이엔드 패션 좋아함.”

이처럼 취향은 자신을 타인과 구분 짓는 감각이고, 동시에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실마리다. 그런데 이 취향이 점점 더 AI의 데이터로 정의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조차 외부에 위탁하게 된다. "나는 왜 이걸 좋아하는 걸까?"라는 질문이 사라지고, "AI가 추천해준 걸 좋아하니까 나도 그런 사람인가 보다"라는 수동성이 자리 잡는다. 플랫폼은 끊임없이 말한다. “당신의 취향에 딱 맞는”, “취향 저격 콘텐츠”, “나만을 위한 추천” 이 표현은 사용자에게 ‘너는 특별하다’는 착각을 준다. 하지만 실은, 모든 사람은 각자의 패턴에 따라 분류된 그룹 중 하나일 뿐이다. AI는 개인을 1:1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한 행동을 하는 수많은 사람의 집합 속에 배치한다. 그 결과, 나만을 위한 듯 보이는 추천도 수천 명에게 동시에 노출되는 동일한 상품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점점 더 비슷해지고,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프로필’로 살아간다. 이때 취향은 더 이상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설계된 경로의 산물’이 된다.
정체성은 생성이 아니라, 기획에 가까워진다. 취향의 유사화는 정체성의 피로로 이어진다. 모두가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음악을 듣고, 비슷한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대. 이것은 피로를 낳는다. ‘나만의 것’을 찾고 싶은 욕망은 더욱 강해지지만, 정작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비슷비슷하다. 이 피로는 SNS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개성적인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사람도, 유행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조회수’와 ‘좋아요’를 얻기 어렵다. AI 알고리즘이 보장하는 노출은 결국 ‘정해진 패턴’에 순응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그 결과, 우리는 ‘자기다움’을 원하면서도, ‘알고리즘 친화적’이어야만 살아남는다. 그것은 곧, 정체성의 자기 검열이 되고, 결국 ‘나’라는 존재는 ‘보이기 위한 정체성’에 갇히게 된다.

 

나를 되찾기 위한 작은 저항 – 알고리즘 너머의 취향을 꿈꾸다

우리는 AI가 제공하는 ‘최적화된 효율’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취향은 때때로 비효율 속에서 발견된다. 한적한 동네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 한 권, 친구의 뜬금없는 추천으로 보게 된 B급 영화, 음악 앱이 아닌 길거리에서 들은 노래 – 이런 경험이 우리를 진짜로 ‘움직이게’ 만든다. 우연은 새로운 나를 발굴하는 통로다. AI는 우연을 잘 다루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의도적으로라도 우연을 경험해야 한다. 일부러 추천 목록을 무시하고 검색해보기, 아예 새로운 취향의 장르에 뛰어들어보기, 친구의 추천을 따라가보며 내 데이터 바깥을 경험하기.

이런 작고 소소한 실천이 바로, 취향의 독립선언이 될 수 있다. AI는 예측 가능한 데이터를 좋아한다. 하지만 우리가 의도적으로 ‘예측을 어지럽히는 선택’을 할 수 있다면, AI는 나를 파악하기 더 어려워진다. 다시 말해, 나는 내 데이터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검색하지 않은 것을 검색해보기, 트렌드에 역행하는 콘텐츠 소비, 익숙한 플랫폼에서 벗어나 새로운 플랫폼 탐색. 이러한 소비는 AI 시스템에 대한 해킹이자, 저항이다. 우리는 ‘AI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따라, 취향의 주인이 될 수도 있고, 피동적인 소비자에 머물 수도 있다.

취향의 본질은 ‘선택’이 아니라, ‘해석’이다. 우리는 결국, AI가 제공한 리스트 속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취향이 달라진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어떤 사람은 사운드를, 어떤 사람은 주인공의 감정선을 기억한다. 같은 책을 읽고도, 밑줄 긋는 구절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 해석의 방식이야말로, 진짜 취향의 핵심이다. AI가 추천한 것일지라도, 그걸 내 방식대로 감상하고 기억한다면, 그건 여전히 ‘나의 것’이다.

AI 시대의 ‘나다움’을 다시 묻는다. AI는 우리 삶에 편리함과 효율성을 가져왔다. 취향이라는 복잡한 감각조차 이제는 정교한 추천으로 정리된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도 ‘나답게’ 살고 있는가?” “이 좋아함은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이 설계한 감정인가?” 기술은 발전할수록 우리의 선택을 더 정밀하게 예측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오히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보다, ‘왜 그것을 선택했는가’를 더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때때로, 시스템 바깥의 선택을 감행해야 한다.

AI는 훌륭한 조력자다. 그러나 취향의 주인은 여전히 나여야 한다. 취향은 단지 소비 목록이 아니라, 나의 사고방식이며, 삶을 바라보는 태도다. 그 태도를 기술에 맡길 것인가, 내가 주도할 것인가 – 이 물음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나다움’의 시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