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풍경과 음식, 사람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가끔은 우연히 마주친 동물 한 마리가 그 도시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낯선 언어와 풍경 속에서 마주한 따뜻한 눈빛, 느긋한 걸음, 털결에 묻은 햇살.
그 짧고 조용한 순간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런 친구들을 여러 번 만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통했던 존재들. 오늘은 그 이야기들을 적어보려 한다.
골목길의 수호신 – 리스본의 고양이들
포르투갈 리스본의 골목은 햇살이 아주 깊숙이 들어온다.
노랗게 바랜 벽돌, 가파른 언덕, 빨래가 펄럭이는 창. 그 모든 풍경을 더 특별하게 만든 건 그 골목 어귀마다 앉아 있던 고양이들이었다.
리스본의 고양이들은 아주 느긋하다. 지나가는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마치 자기 동네 주인인 것처럼 여유롭게 앉아 있다.
어느 날은 베카(Veica) 거리 끝에서, 등 뒤로 그림자를 만들고 있던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작고 말랐지만 눈빛은 아주 단단했다. 나는 한참을 그 아이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고, 다가오지 않으면서도 도망가지 않는 그 ‘거리를 유지하는 친절함’이 인상 깊었다.
어쩌면 고양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도시의 감정을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나는 리스본의 골목을 걸을 때마다 ‘오늘은 어떤 고양이를 만날까’를 기대하게 되었다.
발리의 개들, 나도 모르게 따라가게 되는 존재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만난 개들은 독특했다.
우리나라의 유기견처럼 거리를 떠돌지만, 전혀 외롭지 않아 보였다.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고, 그들은 자신이 ‘이 도시의 일원’임을 알고 있는 듯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우붓(Ubud) 근처 사원에서 만난 흰 개였다.
내가 길을 걷자 천천히 내 옆을 걷기 시작했고, 나는 그 개의 속도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우리는 동행이 되었고, 어느새 같은 리듬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그 개는 나를 사원 입구까지 데려다 주더니, 나를 힐끔 한번 쳐다보고는 조용히 길을 건넜다.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했지만, 그날 하루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동행이라는 것은 꼭 말을 해야만 가능한 게 아니라는 걸, 그 흰 개가 가르쳐줬다.
이탈리아의 갈매기
이탈리아 로마의 티베르 강변, 따뜻한 오후.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중, 내 옆에 갈매기 한 마리가 앉았다.
놀라운 건 그 새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앉았다는 것. 마치 내 친구라도 되는 양, 내 어깨에 살짝 기대어 바라보는 듯한 눈빛.
나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고, 그 갈매기는 무언의 협상을 시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아이스크림 콘의 작은 조각을 떼어 내어 옆에 놓자, 아주 점잖게 받아먹고는 날아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 계속 머물렀다.
그 순간이 너무 평화로워서, 나는 그 갈매기와 한참을 나란히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나는 이상하지 않았다. 그냥 이 도시가, 이 풍경이, 이 친구가 그런 기분을 만들어줬을 뿐이다.
여행자와 동물, 닮은 존재들
여행자와 동물은 닮았다.
낯선 곳을 배회하고, 새로운 공간을 탐색하며, 누군가의 관심과 따뜻한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행 중 만난 동물들을 보면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도쿄 요요기 공원에서 느릿하게 걷는 고양이도,
프랑스 아를의 시장 바닥을 슬슬 걷던 강아지도,
어쩌면 나처럼 이 도시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 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익숙하지 않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
혼자지만, 외롭지 않은 감정.
그리고 그 순간, 같은 공간에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생긴 짧은 연결감.
여행지에서 만난 동물들은 도시의 작은 사인이었다.
사람들이 지나치기 쉬운 길목에서, 느리게, 하지만 분명한 존재감으로 나를 멈추게 만들었다.
그들과의 만남은 짧고 조용했지만, 내 마음속에는 오래도록 남았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여행을 갈 때 풍경만 보지 않는다.
조금 더 천천히 걷고, 골목을 돌아보고, 바닥을 살핀다.
어디선가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작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다음 여행에서도 분명 또 어떤 동물이 나를 반겨줄 것이다.
그들을 만나는 건, 늘 예고 없이 찾아오는 최고의 선물이니까.